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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관념으로의 역사체험

1. 목판의 칼 맛을 느끼게 하는 굵고 함축적인 선의 궤적과 테두리, 흡사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 같은 먹의 범람과 응고, 힘이 들어가 있는 그림 그리고 투박하고 거칠고 화면 겉에서 안쪽으로 비벼 들어간 호흡이 느껴지는 격렬하고 확고해 보이는 그림, 정돈되어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 무겁고 둔중한 저 만만찮은 숨겨지고 은밀하게 내비쳐질 뿐인 주제의 파편들이 유기적으로 흐트러져 있는 유근택의 ‘유적’과 ‘나의 정원’ 등은 지난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업의 연장이고 밀어부침이고 그로인한 나름의 성과이자 현재 진행형인 그의 그림그리기의 초상이다. 먹의 번짐과 색상의 미묘한 변주 그리고 붓질, 모필의 몸동작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선과 얼룩들은 먹의 무하한 표현력과 심층적인 색감을 가시화 하는 한편 이 작가의 삶과 세계에 대한, 자신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인해 돌출되어 나오는 모종의 응시 그에 대한 전언의 흔적들은 간헐적으로 진지하게 욕심껏 들려주고자 한다.
유근택의 그림이 보여주는 몇 겹씩 겹쳐 올라오고 그래서 다양한 이야기와 사건, 사연을 간직한 중첩된 바탕과 그 표현위로 떠도는 흡사 실수엣 같은 형상들은 바로 그 사건과 시간의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 받고 그로인해 형성된 역사이고 인간의 삶이고 자연이고 인간 그자체이다. 그래서 이작가의 궁극의 주제는 다름 아닌‘역사’ 즉 인간적인 역사를 더듬어보고자 하는 의도에 걸려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이러한 역사에 대한 시각과 사고에 호감이 간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이러한 역사에 대한 시각과 사고에 호감이 간다. 즉 물화된 역사주의로부터의 힘겨운 유혹을 벗어나 개인의 육체에서부터 찾아들어가려는 자세 말이다. 그로인해 증폭될 수 있는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인 그래서 한 개인의 정서와 감상적 수준에서 이해되어 버릴 수 있는 아쉬움, 혼돈스러움, 난해함이 우려스럽지만 최근의 역사에 대한 빈번하게 욹어 먹는 저 상투적이고 형식적 차원에서의 접근보다는 구체성의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아울러 특정한 시류적 편승과 패션에 비교적 노출되어 있지 않고 또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진지성과 다분히 구체적인 개인의 삶과 인식의 뿌리에서 그림을 밀어 올리려는 수고로움의 내음이 맡아지고 무엇보다도 작업 자체의 그 과정 속에서 해답을 찾아나가려는 성실 성 등에서 호감이 간다고 할 수 있겠다. 다소의 억지스러움 혹은 지나쳐 보이는 힘이나 필획의 자부심 같은 것 아울러 먹에 대한 신뢰의 범람, 주관화된 난해한 개인사적 체험에의 절대성 같은 그런 아쉬움도 키를 다투지만 보편적으로 그의 그림은 조숙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작가의 나이와 연륜에 비해 삶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나 그것을 형상화해내는 만만찮은 표현력이 함RP 불거져 나오는 그런 성숙된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젊기 때문에 힘이 들어가고 욕심이 생길 수 있지만 이 작가의 경우는 어쨌든 그 욕심을 제대로된 그림을 열심히 그려내는 쪽으로 전환시키고 거기에 승부수를 던지고 있지 다른 루트를 통해 미술 판에 적응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2. 그의 그림은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현상. 사적인 시간의 경험과 기억, 만남 등에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반응을 화면 안으로 불러들여 옮겨 놓고 이를 연출해 놓는데서 시작된다. 난해하고 거의 예측하고 판독해내기 곤란한 인간/ 역사/ 삶/ 사건/ 사물의 어느 한 부분에 대한 고민 혹은 궁금증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 궁금증은 출구가 막힌 그래서 본질적이고 그것 자체로 충족되어 버릴 수 있는 고민, 일종의 불가지론의 뉘앙스를 풍겨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 필연성 위에서 그의 그림이 나름의 실마리를 풀기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이렇게 먹 내음 그윽한 화면위로 문질러 놓았음을 본다. 그는 자기에게 있어 역사란 자신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사건들, 사물들과의 만남에서 비론된다는 인식 아래 그 사건과 사물을 재구성해 화폭위로 옮기고 그를 통해 역사의 본질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란 근원에 대한 관심이고 세계에 대한 관심, 그리고 바로 자신의 육체와 사고, 감정의 다발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와 겹쳐있고 다름 아닌 자아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나에 대한 관심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명/ 육체에 대한 근원, 유전인자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 친할머니와 이런 저런 애기를 나누는 한편 주름이 살갗으로 파고들어 옭죄고 있는 쪼글쪼글한 표정, 주름투성이 사이로 각인된 무수한 시간과 사건의 폭력과 흔적( 역사) 에 관심을 갖고 이를 그리고 또한 조카들의 천지난만하고 순수한 웃음, 표정 그 뒤로 숨겨진 삶의 비극성, 원초적인 불구 성을 읽어내고 또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 육체 ( 육체와 나는 괴상한 한 쌍을 이루고 있다.)를 반복해서 그리고 또한 이를 목판으로 반복해서 파낸가.( 개인적으로는 그의 목판화가 보여주는 힘과 기량에 주목하고 있는데 특히 자화상은 일품이다.) 인간은 사실 누구나 인간적이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하중과 맞서 싸워야 하고 세계와 사물 속에서 인간적인 것은 꿈꾸고 사람하며 살려고 애쓰다가 죽음을 당한다. 그만하면 한 인간의 역사는 충분히 이루어진다는 그런 다소 도저하고 막막한 휴머니즘의 비극성을 나는 유근택의 할머니 그림과 그 밖의 그림에서 얼핏 접힌다. 한 개인, 개인, 그리고 퇴락하고 유적이 되어버린 그릇들, 오래도록 숨 쉬고 있는 땅 , 하찮은 잡풀, 자신의 집 정원과 그대지에 뿌리박고 있는 나무와 화초들, 거센 물줄기(역사)를 거스르며 헤엄치고 있는 사람들, 태극기와 우리 근‧현대사의 격량 속에서 명멸해간 위인들이 그의 그림의 주된 모티브들이고「나」라는 한 인간을 둘러싼 가족사와 주거지와 족보적 관심, 혈연적 호기심, 사물과 세계와의 낮선 조우. 그 속에 깃든 폭력과 상처와 훼손, 박탈이 한데 엉켜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림의 속살을 채우고 있고 그것이 바로 그의 역사에 대한 의식의 질량, 밀도를 이루어 준다. 그래서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들은 이 세계와 똑같이 무한함 부피와 다양성과 알 수 없는 과거/ 미래를 지니고 있다. 그림을 풀어나가는 그의 자세는 따라서 다분히 사적이고 일상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삶과 자신의 주변과의 만남에서 촉발되고 있다. 이점이 그의 그림의 힘이 되고 있다. 자신의 기억의 부식토(腐植土) 가 바로 그가 그리는 흙/ 땅이고 자연이고 인간이고 그의 그림이 되어 잇다.


3. 그 같은 내용과 함께 무엇보다도 그는 먹을 잘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구사하는 먹의 힘과 먹선, 붓질 등이 효과적으로 그의 심중의 응어리 같은 것들을 적절히 끄집어 주기에 효과적이란 뜻이다. 다소 의식적이고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은 색도감이 있고 적절한 강, 약의 조절과 완만한 호흡이 전달되고 대상과 한 몸으로 만나 깊이 느끼려는 의지가 먹을 통해 거침없이 나오고 있지만 다소 특정한 붓질이나 먹의 효과를 은연중 닮아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한쪽으로는 내밀고 있어 그만의 체험으로 인해 나오는 붓질과 먹의 효과에 보다 더 중점을 두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와 함께 그의 그림에서 만져지고 감촉되는 이 친숙성, 가족적 혈연적 유사성, 그런 대상과 작가 자신의 삶을 일치화해 내려는 , 일상의 시간대에서 늘상 만나 접하는 체득되고 여운으로 가라않는 그래서 「나」라고 하는 개인의 섬유질 육체와 신경과 기억 속에 저장되고 따라서 바로 지금의 나를 이루고 형성한 무수한 인연, 기억, 추억, 유전인자가 되어버린 온갖 감정과 정서의 울림을 그득 채워 넣은 것이 그의 그림이라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그의 역사에 대한 시각은 그만큼 헐렁하고 느슨하다. 사소한 사물과 사건, 개인적 체험을 통해 역사의 본질을 헤아려 보려는 자세는 그와 동일한 강도로 역사의 보편성과 구체성에 대한 동시적인 관심을 필요로 하기에 개인사적 사건의 축과 함께 또 하나의 역사에 대한 축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한 작가가 간직하고 있는 고유한 미술적 투쟁과 세계관에 대한 호기심과 만난다. 그 호기심을 인간존재의 고유한 존재론적 물음에 다름 아니다. 그 지점이 이 작가의 그림그리기의 본질적 욕망의 최전선이다. 거기에서 나는 미술의 모범 성 같은 것과도 얼핏 스친다. 모범적인 미술성, 예술성의 기준의 급격히 와해되고 해체되어 나가는 지금의 미술판은 그래서 권태롭고 가라앉은 느낌을 두툼하게 두르고 있고 따라서‘무언가 가치 있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우리가 서있음을 두렵게 깨닫게 해준다. 그에 따라 가치를 세우고 좋은 그림을 추구해나가려는 절박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불거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언저리에는 왠지 이 바라보고 이해하는 주관적 행위가 더러 사디즘적 심리의 충족이고 그래서 자기 과시적 소영웅주의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혹 불어넣어주고 옹색과 경직이 아닐까 하는 측면에서 머뭇거리게 한다는 것도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면 이런 때일수록 타협이나 관점의 상실이 아닌 정확하고 올바른 눈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대임은 부인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짓된 그림, 상투형의 의식적이고 시류영합적이고 자기체험이나 삶이 묻어나지 않은 그래서 얄팍하고, 가볍고 모방 투성이 그림의 오류에 대해 당당히 말해야 하고 대들어야 하고 그래서 최소한 진지하고 겸허하게 올바른 미술에 대해 숙고하고 공부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진정한 용기와 정신적 충실은 이런 시대에 창작과 비평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리라. 아마도 이런 말이나마 서로 공유하고 북돋아 주는 풍토라면 우리 미술계는 희망적일 것이고, 이런 낙관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는 말을 이 작가와 나누고 있다.

박영택 / 금호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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